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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의 탐험 콘텐츠

캄보디아 바이욘 사원의 얼굴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앙코르 톰의 중심, 바이욘 사원에 새겨진 거대한 석조 얼굴들은 신의 형상인가, 왕의 초상인가? 이 얼굴들이 바라보는 방향과 상징은 단순한 시선이 아닌 권력, 종교, 우주관의 복합적 구조를 암시한다.

 

캄보디아 바이욘 사원의 얼굴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얼굴이 건축이 될 때

 

캄보디아 앙코르 톰(Angkor Thom)의 중심부에 우뚝 서 있는 바이욘(Bayon) 사원은 세계 유산 가운데서도 독특한 존재감을 지닌다. 그 중심에는 50여 개의 탑이 솟아 있고, 각 탑에는 네 방향으로 커다란 석조 얼굴이 새겨져 있다. 이 얼굴들은 단지 건축 장식이 아니다. 건축물 전체가 인간의 얼굴로 변형된 듯한 인상은 보는 이에게 강한 심리적 반응을 유도한다. 그러나 이 얼굴들은 단순한 감각의 대상이 아니라, 캄보디아의 정치·종교·우주관을 압축한 다층적 상징이다. 이 글에서는 그 얼굴들이누구를 향하고 있으며,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다각도로 조명해본다.

 

정체성의 첫 실마리: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인가?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해석은 바이욘의 얼굴이 자야바르만 7(Jayavarman VII)의 초상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12세기 후반 캄보디아를 통치하며 앙코르 제국의 황금기를 이끈 왕으로, 불교(특히 대승불교 마하야나)를 국교로 채택한 인물이다. 그의 통치 철학은자비로운 통치에 기초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는 수많은 병원과 도로를 건설하며 왕이 백성을 보살피는 존재임을 강조했다. 바이욘의 부드러운 미소, 눈을 감은 듯한 자비로운 표정은 이러한 통치 철학과 맞닿아 있다. 조각상의 얼굴들은 현실의 왕을 신화적 존재로 승화시키고자 한 조형적 시도였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아발로키테슈바라(관세음보살)의 형상인가?

 

또 다른 유력한 해석은 이 얼굴들이 아발로키테슈바라(Avalokiteśvara), 즉 관세음보살의 형상이라는 주장이다. 자야바르만 7세가 신봉한 대승불교는 자비의 화신으로 관세음보살을 중심에 두었고, 이를 국가 권력의 상징으로 끌어들였다. 실제로 바이욘 사원의 얼굴들은 인도 마하야나 불교에서 묘사된 관세음보살의 얼굴 특징과 유사하다. 감긴 눈, 미묘한 미소, 위엄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은 관음의 이미지와 상통한다. 특히 사방을 향한 얼굴들은중생의 고통을 모두 바라보며 구원하는보살의 속성을 시각화한 것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바이욘은 단지 왕권의 상징물이 아닌 종교적 구원의 상징이기도 하다.

 

‘사면상(四面像)’이라는 상징 언어

 

바이욘 사원의 얼굴들은 거의 예외 없이 동서남북의 네 방향을 향해 있다. 이 네 방향은 단지 공간상의 위치가 아니라, 전 우주의 질서와 균형을 상징한다. 고대 인도에서 기원한 차투르무카(Chaturmukha), 즉 사면상 개념은 네 방향을 동시에 주시하는 신성을 의미한다. 이는 모든 방향을 관조하며 감시하고, 또 다스리는 존재를 나타낸다. 자야바르만 7세가 자신을 이러한 사면신적 존재로 구현하고자 했다면, 이는 단순한 통치자의 초상을 넘은신과 동일시의 선언이라 할 수 있다. 네 방향을 향한 얼굴은 공간을 통제하는 존재이자,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의 시각적 화신이다.

 

바라보는 대상: 신민인가, 천상 세계인가?

 

그렇다면 이 얼굴들은 누구를 바라보는가? 직접적인 위치 분석에 따르면, 주요 얼굴 탑들은 앙코르 톰의 도시문과 외부 공간을 향하고 있다. 특히 남문과 동문을 향한 얼굴 탑은 도시를 드나드는 이들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 이는 종교적 의미뿐만 아니라, 통치자적 감시와 보호의 상징이기도 하다. 외부로 향한 얼굴은 왕의 시선으로서, 내부를 향한 얼굴은 신의 시선으로서 기능했다. 결국 이 얼굴들은 단지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모든 방향과 존재를 향한 시선이며, 공간 전체를 포위하고 감싸는 상징적 시선체계라고 할 수 있다.

 

얼굴의 반복, 정체성의 해체와 확장

 

바이욘의 얼굴은 모두 똑같은 얼굴처럼 보이지만, 세밀히 들여다보면 미묘하게 각기 다르다. 어떤 얼굴은 더 미소짓고 있고, 어떤 얼굴은 더 근엄하다. 이는 조각가들의 의도적 변주였으며, 왕 혹은 신이 단일 정체성에 머물지 않고 다중적 성격을 가진 존재임을 드러낸다. , 자야바르만 7세가 단지 인간 통치자가 아닌, 신의 화신, 자비로운 보호자, 우주의 균형자라는 다층적 위상을 지닌다는 시각적 전략이었던 것이다. 얼굴의 반복은 정체성을 해체하는 동시에, 반복을 통해 신격을 부여하는 상징 장치로 작용한다.

 

조용한 미소, 동남아시아 미학의 정점

 

이 얼굴들이 특히 인상적인 이유는, 그 표정이말없이 미소 짓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강요하지 않지만 부정할 수 없는 위엄, 부드럽지만 단단한 존재감은 동남아시아 미학의 핵심인자비와 침묵의 미에 기반을 둔다. 바이욘의 얼굴은 감정의 과잉이 아닌 감정의 절제로 신성함을 드러내며, 보는 이에게 경외와 위안을 동시에 준다. 이는 건축 조형을 통해 감정의 질서를 제시한 사례로, 불교 조형미학과 정치 이데올로기가 정교하게 맞물려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조물로서의 기능: 얼굴은 장식이 아니라 장치였다

 

이 얼굴들은 단지 예술적 장식이 아니라, 구조적 기능도 갖는다. 석조 탑의 상부 구조를 안정시키는 동시에, 빛과 그림자를 활용해 시간대마다 다른 인상을 주도록 설계되었다. 아침과 오후의 빛은 각각 다른 얼굴을 강조하며, 이는 보는 사람에게 항상 살아 움직이는 듯한 감정을 유도한다. , 얼굴은 단지 형상이 아니라 건축의 일부로서, 공간에 살아 있는 존재로 작용한다. 이는 정지된 조각이 아닌 살아 있는 공간 언어로서의 건축을 구현한 대표적 사례다.

 

바이욘의 얼굴은 방향이 아니라의지를 향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바이욘의 얼굴들은 단순히 어느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향한 통합적 시선을 구현하고 있다. 그것은 통치자의 의지이자, 보살의 자비이고, 우주의 중심에서 뻗어나가는 감시와 보호의 선언이다. 방향성은 단지 기하학적 배치가 아니라, 철학적 구조다. 그리고 이 얼굴들은 지금도 정지한 듯 보이지만, 시간을 초월해 여전히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