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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지향적 인문 콘텐츠

기술 혁신이 불러올 새로운 사회계약론

산업혁명 이후 사회계약론은 근대 시민사회를 규율하는 이론적 기반이 되어왔다. 루소, 홉스, 로크 등의 고전철학자들이 제시한 사회계약의 핵심은 국가와 시민 간의 권리와 책임, 통치와 복종의 합리적 교환이었다. 그러나 21세기 초입, 우리는 인간 사회의 근본 규칙이 새롭게 쓰여져야 할 전환기에 놓여 있다.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블록체인, 자동화 기술 등은 인간의 노동, 경제, 정치 참여, 정보 접근의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으며, 기존의 사회계약 이론으로는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기 어렵다. 기술 혁신이 사회의 모든 구조를 재편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누가 시민이며’, ‘어떻게 권리가 행사되고’,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새롭게 던져야 한다. 이 글은 기술 혁신이 어떻게 사회계약의 원리를 재정의하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인문학적 시선으로 조명한다.

 

기술 혁신이 불러올 새로운 사회계약론

1. 사회계약론의 고전적 전제: 인간, 권리, 국가

고전적 사회계약론은 인간을자연 상태에서 출발시켜, 계약을 통해 문명 사회를 구성하게 된다는 관점에서 발전해왔다. 홉스는 자연 상태를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 보고, 절대 권력의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로크는 보다 낙관적으로 자연 상태에서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 권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루소는 그보다 한 발 더 나아가 공동체 일반의지(general will)에 기초한 평등한 사회를 꿈꾸었다. 이들 이론에서 공통되는 핵심은, 인간이 자율적 존재로서 국가와 계약을 맺고, 상호 간 권리와 책임을 조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이 인간의 판단, 생산, 감정, 심지어 윤리까지 대체하거나 보조하는 오늘날, 이러한 전제가 여전히 유효한지에 대한 회의가 제기되고 있다.

 

2. 기술이 바꾸는 인간 조건: 호모 사피엔스에서 호모 디지투스까지

기술 혁신은 단순한 도구의 진보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조건 자체를 변형시키고 있다. 우리는 이제 자연을 극복하려는 존재에서, 디지털 환경과 융합되는 존재로 진화하고 있다. 스마트폰은 우리의 기억을 외부화했고, 검색 엔진은 지식의 축적 방식을 바꾸었으며, 알고리즘은 감정과 취향의 방향까지 조율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인은 단지 기술을 사용하는 주체가 아니라, 기술과 상호작용하며 정체성을 구성하는 호모 디지투스라 불릴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계약의 전제가 되는개인의사결정 주체성의 개념을 재정의하게 만든다. 전통적 시민은 자신의 판단과 책임으로 정치에 참여했지만, 디지털 시민은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정보와 감정 구조 속에서 정치적 행위를 수행한다. 기술은 인간 주체의 경계를 바꾸고 있으며, 이로 인해 계약의 주체성 자체가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3. 자동화 사회와 일의 재정의: 노동 기반 계약의 해체

사회계약의 핵심 축 중 하나는노동이었다. 시민은 노동을 통해 공동체에 기여하고, 그 대가로 복지와 안전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자동화와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은 이러한 등가 교환의 구조를 흔들고 있다. 플랫폼 노동, 알고리즘 기반 직무 할당, 대체 가능한 자동화 업무 등은 기존의노동=권리모델을 해체하고 있다. 더 나아가 기본소득 논의는노동하지 않아도 인간은 존엄하다는 새로운 윤리적 합의를 필요로 하게 만들었다. 이는 근대 사회계약이 전제했던 노동의 도덕성과 생산성 중심 사고를 넘어서는 지점을 요구하며, 새로운 사회계약에서는 노동 없는 기여존재 자체에 대한 보장이라는 급진적인 개념이 포함되어야 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4. 인공지능과 책임의 문제: 윤리적 행위자는 누구인가?

자율주행차가 사고를 일으켰을 때,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개발자, 제조사, 알고리즘 설계자, 혹은 단지 그 차를 탄 사용자? 이 질문은 단순히 법적 책임을 넘어서 사회계약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흔든다. 전통적 계약에서는 책임의 주체가 명확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스스로 판단하고, 독립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상황에서는 기존의의도 기반 책임원리가 무력화된다. 이는 사회계약론에서 중요하게 여긴 책임의 투명성, 대가의 예측 가능성을 흐리게 만든다. 새로운 사회계약은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 인공지능) 사이의 관계, 권리, 책임 구조를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인간만이 책임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아니면 기술에도 일정 수준의 법적 의무나 제약이 부여되어야 하는가? 이 물음은 사회계약을 기술까지 확장해야 하는 시대적 요청이다.

 

5. 데이터는 새로운 시민권의 조건이 될 수 있는가?

현대 사회에서데이터는 새로운 자산이자 통치 수단이다. 사용자의 행동, 감정, 정치 성향, 건강 정보 등 방대한 양의 데이터는 기업과 국가에 의해 수집되고 분석되며, 이 과정은 점점 더 일상화되고 있다. 그런데 정작 데이터 생산자인 시민은 이 흐름에서 배제되거나, 단순히동의라는 형식적 절차로 소외된다. 이 같은 상황은 새로운 형태의 시민권, 디지털 시민권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디지털 사회계약은 사용자의 데이터 권리접근, 수정, 삭제, 보상—를 명시하고, 데이터의 사회적 재분배 방식을 포함해야 한다. 과거에는 토지와 노동이 정치 참여의 자격 조건이었다면, 오늘날에는 데이터의 통제권이 새로운 시민적 자격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6. 기술 거버넌스는 누구의 손에 있는가?

기술 혁신은 중립적이지 않다. 그 설계와 적용에는 정치적, 경제적 권력 관계가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새로운 사회계약론은 단지 기술 사용의 윤리 문제에 머무르지 않고, 기술의 개발·배포·운영을 결정하는거버넌스 구조를 문제 삼아야 한다. 지금까지의 기술 발전은 대체로 거대 민간 기업의 주도로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공공성과 투명성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다. 기술 민주주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시민이 기술 정책 결정 과정에 실질적으로 참여하고, 공공영역이 기술 기획과 규제에서 더 큰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 기술 거버넌스의 주체를 새롭게 설정하는 작업은 사회계약의 주체 재구성과 직결된다.

 

7. 디지털 불평등과 계약의 균형 붕괴

기술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혜택을 주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 접근성, 정보 격차, 알고리즘 차별, 교육 인프라의 차이는 기술 기반 사회에서 새로운 계급과 불평등을 만들어낸다. 이는 기존의 사회계약이 전제했던 '기회의 평등'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점을 시사한다. 기술은 어떤 이에게는 기회를, 또 다른 이에게는 배제를 의미한다. 따라서 새로운 사회계약은 기술 혜택의 분배 방식, 디지털 교육의 권리, 알고리즘 공정성의 감시 구조를 포함해야 한다. 사회구성원 간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약의 핵심 원칙인공정성이 기술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며, 기술이 만들어낸 불균형을 교정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8. 디지털 정체성과 다중 시민권: 계약의 다층화

가상공간은 하나의 삶의 영역이 되었다. 사람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다양한 역할과 정체성을 수행하고, 이는 과거의 단일 시민 정체성과는 다른다중적 시민권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은 현실 세계에서는 투표권을 가진 시민이지만, 온라인 플랫폼에서는 규칙의 대상이자 동시에 콘텐츠 생산자이자 소비자다. 이처럼 하나의 개인이 복수의 사회계약 속에 존재하게 되는 시대에는, 기존의국가 중심 사회계약론은 한계를 드러낸다. 새로운 사회계약은 다양한 디지털 공동체에서 작동할 수 있는 규범 체계, 플랫폼 내 시민권 개념, 데이터 기반 소속감과 권리를 모두 포함해야 한다.

 

9. 미래의 사회계약은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하는가?

이제 사회계약은 더 이상 국가와 시민 간의 양자적 계약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기술, 국가, 기업, 알고리즘이 복잡하게 얽힌 다자간 계약 구조가 되어야 한다. 미래의 사회계약은 다음 세 가지 원칙을 중심으로 구성될 수 있다.

첫째, 포괄성: 사회계약은 인간만이 아니라 비인간 행위자와의 관계까지 고려해야 한다.

둘째, 적응성: 기술 변화의 속도를 고려해 유연하게 수정 가능한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셋째, 공공성: 데이터와 기술의 사용이 사회 전체에 기여할 수 있도록, 이익의 재분배와 감시 구조가 필요하다.

이러한 요소들은 단순히 법률이나 정책의 차원을 넘어, 기술 윤리, 정보 철학, 정치철학이 결합된 새로운 사상 체계를 요구한다.

 

기술은 사회계약을 다시 쓰게 만든다

기술 혁신은 단지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규율하는 철학적 원리를 다시 묻는 도전이다. 기존 사회계약이 시민과 국가의 관계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면, 새로운 사회계약은 인간과 기술, 인간과 데이터, 인간과 알고리즘 사이의 관계를 포함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국가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물었지만, 이제는 기술 기업과 알고리즘에도 윤리적 책임과 권한의 경계를 설정해야 한다. 기술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그것을 어떤 규범으로 운영할 것인가는 결국 우리 모두가 새롭게 맺어야 할 사회계약의 문제다. 새로운 사회계약은 단지 규제가 아니라, 기술을 인간 중심으로 되돌리기 위한 철학적, 윤리적, 제도적 실험이어야 한다.